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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1기/사랑과 폭력

가정에 모범이 따로 있는 건가요? / 이범성

가정에 모범이 따로 있는 건가요?

- 이범성(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우리 교회에 영어예배를 인도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계셨다. 한국에서 지내신지 삼십년이 훨씬 더 넘었지만 한국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내게는 무척 이상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 여자분은 언젠가 나를 심하게 나무라셨다. 내 가족상황을 들어보시더니 어떻게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면서 입양아를 하나도 안 두고 살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긴 내가 선교동역하던 나라의 동료목회자들은 둘에 하나 가정에 자기 자녀의 수만큼 입양아를 함께 키우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녀교육이 경제문제와 직결된다. 사교육이 일반화되어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 보내기 위해 맞벌이부부가 되어야 한다. 행여 엄마가 적은 돈이라도 벌어오지 못하면 아빠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학원비를 낼 여유가 없다. 아이가 둘 이상이면 그 형편은 더욱 그렇다. 나의 경우 입양을 못한 것이 꼭 경제적 이유는 아니다. 이웃 아이들을 위한 풍부한 사랑이나 책임감 등이 결여되어서 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혼자 생각한다. 나는 너무 바쁘다고.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그리고 한 인격을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냐고. 그래서 이런 직접적 부담감 없이 사랑을 실천하겠노라고 말이다.

 

나에게는 구십이 가까워가는 부모님이 계시다. 나의 형은 올해 정년은퇴를 하고 나의 동생은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는데, 최근에 입사한 동료직원은 동생의 아들하고 동갑이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아직 몇 해 더 일할 수 있다. 우리 집안은 손이 귀한 편이다. 우리세대보다 우리 자녀세대가 숫자가 더 적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손이 귀하다는 것은 사실 옛날 말인 것 같다. 귀하다는 말보다는 자식 두기를 원치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줄고 노인들이 늘고 세상에 대가족은 없어진지 오래고 핵가족이 다시 일인가구로 치닫고 있다. 경제적 논리만으로는 이 변화를 해석하기에 불충분하다. 성의 해방이 한 몫을 했다. 1960년대에 피임약이 개발 보급되면서 성은 더 이상 생육하고 번성하는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사랑과 쾌락의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경제행위 가능성이 높아지고 활발해지면서 적어도 경제적 이유로 가족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여성의 불편한 현실이 극복되었다. 이제 가정은 성의 개방과 더불어 그 기준이 모호해졌으며 모델이 다양해졌다. 가정은 어떤 구성원으로 이루어지는가? 구성원의 혈연관계는 필연적인가? 가족 구성원의 관계를 이루는 근본은 무엇인가? 일인세대도 한 가정이고 여럿으로 구성된 시설도 한 가정인가? 가정을 이루는 기본단위는 여전히 이성으로 이루어진 부부를 기초로 하는가?

 

나는 십 수 년 이래 장애인 일인세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가족과 같은 모양의 공동체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역교회의 교인으로서 만났지만 주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주중에도 생활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로간의 연대감은 요즘의 가족구성원에 비해서 그다지 뒤지지 않을 것 같다. 그룹채팅으로 매일 묵상할 말씀을 공유하고, 매주 수요일지역사회에서 장애인복지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학령기때 경험하지 못한 사회공부를 하고 정서를 고양하는 음악수업에 참여하며 한나절을 함께 보낸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지낸다는 면에서 가정의 역할을 하면서도 주중 하루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보통 가정에서는 꿈도 꿀 수 없을 비현실적 바램이 아닐까? 그동안 이상한 거주형태로 취급되던 각종 원인의 일인세대들이 다양한 형태의 연대적 삶의 모양으로서 지속 가능한 가정 형태로 인정받고, 그 안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보듬고 위하는 분위기가 현실 삶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동안 혹시 이기적인 공동체로서의 기능만을 추구하던 가정들이 사회적 공동체의 기능을 가지고 더 나은 가정, 가족으로 순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되묻던 예수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말씀으로(막3:31-35) 가족을 정의하셨다. 서로 사랑하는 연대를 지향하는 공동체로서 가정을 구상해 보자. 가정을 이루는 것은 사랑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사랑에 대해 성경으로부터 배운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첫 편지(13:1-13)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허다한 죄도 덮을 수 있고, 사람이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상처입고 허물어져가는 모든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