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과 신학 1기/사랑과 폭력

[취지문] 그 소녀의 목소리를 찾다 / 양권석

5월 사건과 신학 취지문

그 소녀의 목소리를 찾다.


- 양권석(성공회대학교)

정말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녀는 간만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 나갔다. 엄마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수를 받아 든 소녀는 엄마 등 뒤에서 목이 졸렸다. 폭력과 강간에 노출된 소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알렸다. 발목에 묶인 끈을 풀고 자신의 몸을 힘껏 떠올렸다."(송진순의 『소녀 말을 건네다』 중에서). 그 소녀 앞에서 감히 어떻게, 가족을 말하고, 부모와 자식 관계를 말하고, 아니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논할 수 있을까? 말문이 막힌다. 이 소녀의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를 향해 다시 다가온 그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입술을 달구던 그 무수한 달콤했던 말들은 얼마나 가련한 것이었던가?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 우리들이 나누고 있는 그 거룩한 언어들은 또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소녀에게 독배를 건네고, 자신의 등 뒤에서 소녀의 죽음을 느끼고 있었을 그 여자는 누구인가? 그 여자의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여자의 등 뒤에서 그 여자의 분신 같은 그 소녀를 목 졸라 죽이는 그 남자는 어디로부터 온 사람인가? 이 참혹한 계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본래적 죄성을 말하면 되는 것인가?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예, 존속살해, 자녀 살해를 살아온 인간이란 종족의 후예들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예외 이거나 변칙인가?


가족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권위적 언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남자와 여자가 부모와 자식이 그 관계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남녀의 관계를 표현하는 모든 언어들, 부부, 부녀, 사랑, 성애, 오누이 등등, 그 모든 이름과 언어와 개념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사람과 생명을 도구로 삼는다면, 그들은 이미 폭력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권위적인 이름들, 언어와 개념들을 등에 업고, 그 안에 감추인 폭력을 애써 무시하면서,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계속 그들의 포로가 되게 하는 언설들은 모두 폭력과의 비겁한 공모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거룩한 표현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일 수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감추어진 폭력의 현실을 보지 못한 채, 우리가 그 달콤함과 거룩함에 갇혀 있을 때, 이미 그 소녀는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없이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적 삶과 관계 형식들의 반영이고 표현이다. 소녀와 남자와 여자 그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언어와 표현들과 행동들은 그들만의 것일 수 없다. 이미 우리의 말과 행동 안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고 관계 맺는 형식 안에, 그들이 만들어 낸 그 참혹한 표현들의 뿌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밥먹고 사는 방식에, 우리가 관계하고 사랑하는 방식에, 우리가 바라고 욕망하는 방식에, 그리고 우리가 경쟁하고 다투는 방식에 근원적인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가진 자들은 문제를 감추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미학적 자산들을 가지고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서 다른 세상을 즐길 수 있는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사회적 통로들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관계형식은, 어떤 치장도 없이, 벌거벗은 채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 여자와 소녀와 남자, 그들은 우리의 생존 방식, 곧 우리의 먹고 사는 방식이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서로 죽이는 과정을 통해서 이어지는 삶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에게는 ‘전쟁 같은 삶’이지만, 그 여자와 소녀와 남자에게는 ‘이미 전쟁이 되어버린 삶’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입을 열어 이야기를 해도, 내 입술은 여전히 남의 입술이다. 내 것 같지가 않다. 내 안에서 그리고 저 위에서 나를 향해 부릅뜬 눈은 여전히 숨을 곳을 찾는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선 그 소녀는 오히려 나를 더욱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글을 쓰는 우리 모두가 이런 심정이었고, 이런 기도였다. 우리 모두가 각자 그리고 함께 응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 소녀의 목소리를 찾았다. 함께 생각을 나누어 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수많은 마음들이 이어지고, 수면 아래 감추어진 새 삶의 꿈이 다시 힘차게 떠오를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