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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지나는 사순절의 기도 / 이범성 삼일절을 지나는 사순절의 기도 - 이범성(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시편 69편 중에서) 기독교회의 절기로 사순절로 접어든 시점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자니 삼일운동 기념일의 무게가 느껴진다. 백 번째 삼일절을 기념하는 수많..
2019 시대유감 / 남기평 2019 시대유감 - 남기평(한국기독청년협의회) 3.1운동 100주년이었다. 그랬다. ‘100’단위는 나름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그 날을 기념하느냐에 따라 의미하는 바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이번 개신교계 행사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100”이라는 아무 의미 없는 숫자였다. 재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그냥 지나치고,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니 더욱 그렇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스쳐가면서, 우리는 독일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한 노력을 비교해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이들은 10년 가까이 500주년을 준비하면서 500년 전 역사의 흐름을 오늘날의 역사흐름에 빗대어 조명하며, 다양한 분야의 학술논의 등을 통해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삼일운동과 예수운동,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한수현 삼일운동과 예수운동,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삼일운동 이후 백년이 지났다. 신학교 시절, 한국교회사 시간에 삼일운동 당시 전체 인구 1%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인 비율에 비해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인의 비율은 30%에 달했다고 들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가 자신들의 신앙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참기독교인이 참조선인이라는 믿음과 조선의 독립이 결박을 풀고 자유케 되는 신앙 체험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서양 종교였던 기독교의 힘을 빌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친일 보다는 친미, 친유럽이 더 조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식민과 전란의 시대에서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밀운불우’(密雲不雨) -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지나며 / 송진순 ‘밀운불우’(密雲不雨) -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지나며 - 송진순(이화여자대학교) 3월 1일에서 삼일절로 한국인에게 3월 1일은 여느 달의 첫 하루와 다르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일제 강점이라는 식민 경험은 이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송두리째 뒤틀어 버렸다. 하여 전 국민이 일본에 항거하여 만세 함성을 외친 날, 우리에게 이 날은 3월 1일이 아니라 삼일절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바디우(A. Badiaou)에 따르면, 사건이란 본래 기존의 상황이나 제도화된 지식과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3.1운동은 특별한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으로서 3.1운동이 함의하는 바는 사뭇 심엄하다. 그것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선포한..
3.1운동 100주년, 우리는 왜 하나 되지 못했을까? / 김한나 3.1 운동 100주년, 우리는 왜 하나 되지 못했을까? - 김한나(성공회대학교)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골로사이 4:14) 사도 바울은 심각한 분열의 문제를 겪고 있는 고린토 교회에 편지를 쓴다. 당시 고린토 교인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한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를 경시했고 이는 자연스레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때 바울은 우리가 받은 은사는 각기 다르지만, 그것은 같은 한 성령에게서 왔고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한다(I고린토 12:4-7, 공동번역).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유기적인 인간의 몸에 비유하며 각 사람을 그 지체로써 묘사한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폐쇄적 가족주의를 넘어 다시 광장으로 / 성석환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 기념방식에 대해 : 폐쇄적 가족주의를 넘어 다시 광장으로 - 성석환(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교회의 ‘3.1운동 100주년(이하 100주년)’에 대한 기념은 이미 끝나가고 있다. 기념세미나, 기념예배, 기념대회들이 벌써 지나간 사건이 되고 있다. 이는 유독 숫자와 이벤트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의 도착적 기념방식에 기인한다. ‘평양대부흥 100주년’도 그러했고, 그 중요했던 ‘종교개혁 500주년’도 그렇게 과거가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무수히 많은 사건을 기념하지만 때로 형식이 그 의미를 배반하고, 기억하지만 때로 퇴행적이거나 추억에 매몰되고 만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현재화될 수 있을 때, ‘100주년’과 같은 계기는 오늘의 의미로 재해석할 기회를 허용한다. 만약 그 ..
3.1운동 100주년과 목소리 없는 사람들 / 박흥순 3.1운동 100주년과 목소리 없는 사람들 -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저 여인 하나 구한다고 조선이 구해지는 게 아니오.” “구해야 하오. 어느 날엔가 저 여인이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지난 해 방영했던 드라마 에서 최유진과 고애신이 나누는 대사 중 하나다. 일본군에게 폭행당하는 조선 여인을 구하려 나서는 고애신을 막아서며 최유진에게 반문했던 말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로 빼앗기고 잃어버린 나라를 구하는 일에 빈부귀천과 남녀노소가 없다는 외침이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선뜻 나섰던 그 선택이 정말로 옳은 결정이었는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지금 여기에서 다시 묻게 된다.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어떤 방식으로 기념했는가? 한국교회는 당연하게도 연합해서 100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