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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이 빌어먹을(수도 없는) 세상에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들을 돌아보며... / 이영미

 

이영미 (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새가정 총무)

 

디어 마이 프렌즈!

2016년에 방영되었던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제목이다.
소설가인 박 완(고현정)이 엄마(고두심)의 친구들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로 하고, 황혼을 보내는 이들의 삶을 적어가는 드라마다. 감동과 울림을 주는 여러 장면이 있지만, 그 가운데 잊지 못할 장면은 딸 완이가 30년 동안 꾹꾹 묻어왔던 이야기를 울분을 터뜨리며 엄마 장난희를 향해 분노하는 장면이었다.

 

딸 : 앞으로 내 인생에 끼어들지마.
엄마 : 끼어들면? 끼어들면? 엄마가 니 인생에 끼어들면 어쩔건데, 이 기집애야!
딸 : 난 엄마꺼니까, 엄마가 하지 말라는 짓은 못하지...
여섯 살 때, 할머니 집 앞 들판에서 약 먹였을 때, 나는 분명히 알았거든. 난 엄마꺼구나, 그러니까 무서워도 약을 먹으라고 하면 먹어야 하는거구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잘못했다 그래! 나한테, 왜 그랬어? 잘못했다 그래!!
왜 그랬어? 나한테!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가 죽여도 돼?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왜 엄마꺼야? 말해!
엄마 : (절규하며) 당연히 넌 내꺼지. 나 죽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너를 두고 가.



4분 정도의 시간 동안 명연기를 펼치는 두 배우는 연기자로서가 아니라, 실제 30여 년의 아픈 가족사를 안고 있는 엄마와 딸로 보였다. 나는 그 장면을 본 이후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접하면 완이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만 같다.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가 죽여도 돼? 나한테 왜 그랬어? 내가 왜 엄마꺼야? 말해!”



분명한 사실은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자녀가 부모의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나 부속물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남아있는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도 자녀 살해 후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종속된 관계 속에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자녀를 살해한 후 자살한(자살을 결심한) 부모들의 행동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드라마 속 엄마의 대사처럼 “나 죽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너를 두고 가.”라고 말하며 이 사회에 남겨질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이 이해되기도 한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선택이었지만, 실제로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생활고로 인한 이유가 가장 많다.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국가와 지역사회가 위기가정, 취약가정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며 좀 더 안전한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면 자녀 살해 후 자살하는 사건은 지금보다 줄어들지 않을까?


중요한 사실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명백한 살인이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 범죄인 것이다. 부산지방법원 박주영 판사가 2019년 생활고로 아이와 죽음을 선택한 부모에게 내린 판결문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우리는 살해된 아이의 진술을 들을 수 없다. 동반자살은 가해 부모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피살이다. 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살인이다. 이런 유형의 범행은 동반자살이 아니다. 동반자살이라는 워딩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온정주의적 시각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살해 후 자살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 범죄이다”



‘완도 실종 가족 사망 사건’ 이전까지는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흔하게 사용했었다. 그러나, 미성년 자녀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죽음이기에 동반자살은 맞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으로 명백한 살인의 행위임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아울러 많은 언론이 부모의 잘못된 인식(자녀를 소유물로 여겨 살해까지 하는)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어느 신문사 사설의 제목 ‘유나(실종 아동)는 살해당했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허점이 드러난 교외 체험학습 제도와 관리 부실을 지적하고,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는 보도 역시 잇따랐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고 아껴줄 것이라고 믿었던 부모가 나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망자가 되어서든, 생존자가 되어서든 치유 받지 못할 가장 큰 상처일 것이다. 생활고, 배우자의 외도, 가정불화, 심각한 우울증 등 어떤 이유라도 자식을 살해하려는 시도에 피해자가 되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시린 기억을 마음 한 곳에 묻고 살아간다고 한다.



“어리다고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커가면서 갑자기 떠오르면 어릴 때보다 지금이 더 아프다. 분명한 학대였고, 살인미수였다.”라고 인터뷰하는 생존자의 증언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가족 모두를 품에 안고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기까지 국가는 무엇을 하였을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완도에서 실종된 일가족의 죽음을 보며, 많은 국민은 부모를 비롯한 어린 유나 양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가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고립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논의하지 못했다. 앞으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조 양을 위해 자녀 살해 후 자살할 그들의 고립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리고,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지난 7월 말, 완도 바다에서 별이 된 가족이 사망하기까지 그들에게 걸려 왔던 전화는 가족 셋이 나눈 통화가 전부였다고 한다. 최근, 수원 세 모녀 사망 역시 시신을 수습할 친척도, 슬퍼할 가까운 이웃들도 없었다고 한다.



송파 세 모녀 사건, 완도 실종 가족 사망 사건, 대구 발달장애 자녀와 부모의 사망 사건, 수원 세 모녀 사건 등 몇 년 사이 일어난 가슴 아픈 사건들을 보며 이제는 무엇인가 안전한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형식적인 ‘사회안전망 구축’ ‘복지 사각지대 제로’ 등의 선언적인 단어들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외침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가 방치했던 그들의 고립을 뉘우치며 함께 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분배의 불평등이 더욱 공고해지며, 이로 인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야말로 ‘마을공동체’ 개념이 간절히 요구된다.



남편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빚 독촉에 시달리던 엄마가 홀로 남은 딸과 함께 자살을 결심했다가 이웃의 적극적인 관심과 돌봄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선진국에서는 위기 가족을 함께 지원하는 통합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국가가 주거정책, 교육정책, 돌봄정책을 통해서 아동의 양육을 책임진다고 한다. 그러기에 아동이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라고 말한다.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또한 국가와 마을공동체가 위기가정과 소외된 가정을 함께 책임지고 힘쓰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교회와 성당, 복지 센터들부터 세심한 관심으로 이웃들을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종속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생명 가운데 하나이며, 독립된 존재이다. 지구별을 떠나 하늘 어딘 가에서 별이 된 우리의 아이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 그 곳에서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