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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이 빌어먹을(수도 없는) 세상에서

누가 이웃을 소비하는가? / 이윤석

 

이윤석 (NCCK 교회일치위원, 군산복음교회 담임목사)

 

이웃의 ‘고립과 단절’을 구경하고 소비하는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우리 시대가 ‘고체 현대’에서 ‘액체 현대’로 변화했다고 짚었다. [각주:1] 그는 계획적이고 안정적이며 합리적이면서 예측가능한 사회인 고체 현대가, 급격한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등장, 소비주의의 심화 등으로 인하여 액체 현대로 변화되었음을 논증했다. 이를 통해 바우만은 오늘의 우연성, 불확실성, 이동성, 예측불가능성이 낳은 개인적 결과를 강조하고자 했다. 이 시대는 모든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유형의 삶을 모색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개인화하고 사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임을 그는 통찰했다.

전남 완도 일가족 사망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 이러한 바우만의 통찰이 얼마나 예리하고 설득적인지 알 수 있다. 언론은 대체로 생활고를 비롯한 가족의 사생활을 캐는 데 집중했다. 대신 사회안전망의 부재 등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부 언론 매체만이 사건이 남긴 문제를 짚고자 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일가족 사망 사건을 보도하면서 매체는 사망 이유에 대한 여러 추측을 늘어놓고, 흥미 위주의 지적을 보태고, 수색 및 수사 과정을 전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안을 다수 노출하면서 자극적인 보도를 이어가 조회수를 올리는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자살예방협회는 완도 일가족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실종 사건으로 시작해 추적과정이 상세히 보도되면서 도구, 경제적인 상태, 특정 자산 관련 문제 등 사고 당시 과정들이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고, 여러 추측까지 함께 인터넷에 회자되었으며, 시신이 발견된 이후에도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미성년 고인의 사진이 여전히 무분별하게 언론 보도를 통해 유통되고 있는 등 호기심만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콘텐츠들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에 심각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각주:2] 그렇게 일가족 사망 사건은 쉽게 잊혀버릴 암울한 이야기로 소비된 것이다.

완도 일가족 사망 사건은 2014년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큰딸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는 일터를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끝내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은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집세와 공과금으로 전 재산인 70만 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또한 최고은 작가 사망 사건도 떠오른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남은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집 문을 두들겨달라’라는 쪽지를 적어 붙였던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고 있었던 그녀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며칠 동안 먹지 못하여 사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가슴 아픈 사건들이 보여준 이 사회의 일면은 ‘고립과 단절’이다. 사회에서 약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결국 가장 철저히 고립되고 단절되어 버린 이들이다. 여러 개인들이 보내는 위험 신호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액체화’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데 익숙하며, 모든 문제와 실패의 결과와 책임을 개인에게 그리고 사적 차원으로 돌리는 것을 당연시하는데, 한국교회의 경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근원적인 돌봄의 관계와 공동체

우리는 의존적인 사람, 의존하려는 사람에게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나약함이나 게으름이라는 이미지를 쉽게 부여한다. 아이를 교육하는 이유는 마땅히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인에게 의존적이지 않은 상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독립적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가치이고 기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독립성’이 고양되고 심화된 인간은 ‘고립된 인간’과 유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돌봄선언」에 담긴 더 케어 컬렉티브(The Care Collective)의 진술은 설득력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란 자율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실패를 모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의 승승장구는 복지국가의 해체, 그리고 민주적 제도와 시민 참여의 와해를 정당화한다. 돌봄이 개인에게 달린 문제라는 생각은 우리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각주:3]

한자로 인간(人間)이란 문자는 사람을 설명하는데 있어 ‘사이’, ‘관계’라는 의미를 글자가 가진 모양과 뜻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인간’이란 문자적 의미를 기준으로 볼 때 분리되고 고립되어 단절되어 버린 인간은 가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요, 모습이 된다. 지난 2021년 한국이 ‘초저신뢰 사회’라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각주:4] 민주주의 사회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현재 한국 사회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집단만 믿는, 그야말로 분절되고 파편화된 사회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현상이 주류적으로 나타나는 사회가 ‘초저신뢰 사회’다. 

오늘의 초저신뢰 사회에서 돌봄은 그저 개인과 가까운 친족 사이의 일이다. 친족과 시장에 맡겨진 돌봄의 체제에서는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관계만 돌보고 타자에게는 무심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나타난다. 게다가 독립적 인간, 독립적 생활을 성취하는 것을 필수적인 가치와 의미로 여기도록 교육받았으니 이러한 구조적 경향은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다. 돌봄이 결국 시장과 개인에게 맡겨짐으로 공동체와 사회는 돌봄의 책임을 거의 느끼지 않게 된다.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게 당연해지면서 사회적 차원의 신뢰 관계는 약화되어 간다. 나약함과 모자람을 살펴주고 채워주지 않는 사회와 공동체에서 사회적 책임 의식과 연대 의식은 형성되기 어렵다.

완도 일가족 사망 사건과 이를 보도하는 매체의 상황을 통해 보건대 오늘 우리 사회는 액채화하고 있다. 이 사건의 보도를 통해 볼 때, 우리 사회는 모든 실패의 책임은 개인에게 돌리며, 고립되고, 단절된 삶의 참혹한 끝을 그저 구경거리, 이야깃거리로 취급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른바 초저신뢰 사회 불리는 이 사회의 현실은 모든 돌봄의 책임을 개인과 시장에 내던져버렸다. 초저신뢰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독립성’, ‘자급자족’, ‘개인성과 개별화’를 강조하지만, 사실 지속가능한 ‘독립’이란 모두에게 돌봄이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각주:5] 애초에 돌봄 없이는 독립적 인격과 삶의 육성이 불가능하다. 기본적인 돌봄을 바탕으로 자율성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다. 만일 이러한 기본적 돌봄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독립’은 그저 ‘고립무원(孤立無援)’, ‘일엽편주(一葉片舟)’일 따름이다.

너는 누구의 이웃이냐고 물으시는 예수,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를 시험한 율법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율법교사는 예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가 답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한 말씀과 같이 그에게 행하라고 대답하셨고, 다시금 그는 예수께 스스로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는다. 이렇게 율법교사가 재차 예수께 물었던 이 물음은 사실 ‘어디까지 내가 사랑해야 될 이웃입니까?’라는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만 자기 이웃이라 생각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같이 율법을 준수하는 이들만 자기 이웃이라 생각했다. 또 광야에서 생활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은 자기 공동체에 속한 이들만이 자기 이웃이라 여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해야 할 대상을 묻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이해 관계와 타인에 대한 편향적 의식이 담겨 있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질문이었다. 이 질문의 바탕에는 자신의 이웃이 될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랑과 돌봄과 배려를 수행하겠지만, 자신의 이웃이 될 수 없는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곧, 이웃이 아닌 타자의 고립과 단절을 야기해도 무방함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판단과 결정이 깔려 있다.

바우만이 말한 ‘액체 현대’와 같이 ‘액체화’된 사회에서 이웃을 찾기란 어렵다. 돌봄의 관계, 책임적 관계를 맺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문제와 책임을 개인과 시장에 돌린다. 그저 자기 자신과 가족 및 친족 그리고 시장만이 이웃이 될 뿐 그 너머로 이웃의 범주가 확장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신을 멸시하는 유대인, 강도 만난 자를 헌신적으로 도운 사람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자비와 긍휼을 베푼 사람이다. 참으로 인간이라는 ‘관계’ 그 ‘사이’를 무조건적인 인간애로, 사랑과 돌봄, 배려로 채운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율법교사에게 들려주시면서, 그에게 물으셨다. “이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는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바꾸게 하신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가 아니라,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언론을 통해 ‘누가 내 이웃인지’ 물으며, 그저 이웃의 고통과 아픔, 이웃의 참혹한 현실을 구경거리로 삼고, 이웃의 이야기를 소비하고 휘발시키는데 바쁘다. 이제는 바꿔 물어야 한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것인가?” “왜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수 없었나?” “강도 만난 자를 고립시키고 단절시킨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어떻게 우리는 강도 만난 자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는가?” “강도 만난 자에 대한 구제와 돌봄은 어떻게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인가?” 한국교회는 이러한 질문을 더욱 적극적으로 힘써 물어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돌봄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무수히 많은 상황에 대하여 열려 있을 때만 그러하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르기에 상호의존적이며 서로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돌봄의 관계, 돌봄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면서 인간은 인간의 모습과 역량을 회복할 수 있다.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무엇보다도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각주:6]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배와 강박 아래서 액체화된 사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b)란 가인의 말이 우리의 응답과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1. 지그문트 바우만, 이일수 역, 「액체근대」 (서울: 강, 2009) 참고. [본문으로]
  2. 이병문, “‘자녀 살해 후 자살’ 막기 위한 사회적 논의 시급하다,” 매일경제 (2022. 7. 4.) mk.co.kr/news/it/view/2022/07/583592/ [본문으로]
  3.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서울: 니케북스, 2021), 30. [본문으로]
  4. 이상원, “지금 한국은 초저신뢰 사회다,” 시사인 (2021. 9. 1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511 [본문으로]
  5.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은 ‘독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립된 삶은 우리가 모든 일을 혼자 하기를 원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거나, 고립되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립된 삶은 비장애인 형제자매, 이웃, 친구들이 당연시하는 선택과 통제권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동등하게 갖기를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61. [본문으로]
  6.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