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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이 빌어먹을(수도 없는) 세상에서

리셋 버튼과 밥상 공동체 / 이해청


이해청 (성공회대학교)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출구는 점점 더 사라져만 간다. 삶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 어느새 손은 리셋 버튼 위에 올리어져 있다. 인간이라 지칭되는 그 명사에 도전장을 내밀고서라도 누르고 싶은 생각이 날뛴다. 심지어, 이제는 출구가 없더라도 좋다. 버튼을 누르고 싶도록 만드는 참혹한 현재, 이 현재가...

 

두 달 전 일가족이 완도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말들이 오갔다. 대략 두 주전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당시, 내 머리에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애도와 추모로 때우기만 하고 변화의 노력이나 의지는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지독한 회의가 몰아쳤다. 그렇게 고민만 하고 한 주가 흐르던 차에, 또다시 빚더미에 내몰려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나의 지독한 회의감과 그로 인한 슬픈 예감은 결코 틀린 적이 없다. 그렇다. 이 나이쯤이면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져서 거봐 그렇잖아 그래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자조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우습게도 나 역시 밀려나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저들처럼 밀려나진 않았다는, 소위 구역질이 날 법한 허위의식/안도감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해법을 늘어놓는다.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회의하고 자조하면서도 어처구니없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간사함일까? 아니면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일까? 딴은 이들과 연대하고/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일까?

 

어쨌든, 뭐라고? 해법이라고? 도대체 무슨 해법이란 말인가!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담론에서 이 사회의 복지 시스템을 제대로 알지 못한 개인의 잘못(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이라는 담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덕적·종교적·사회적·경제적 해법들을 기사로 접하면서 이렇게 많은 해법이 있음에도 왜 이런 일이 계속이라는 물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고 별 수 있을까. 이 두 담론 사이에서 제시된 여러 해법들을 오락가락하면서 “그래, 결국 그런 것이었군.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것이었군.”이라고 읊조리며 항복하고 만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세상을 더 많이 아는 이들의 여러 해법들을 들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무디어져간다. 분노가/물음이 어느새 차분함과/수긍으로 바뀐다. 해법으로 제시된 여러 담론들에 담긴 논리가 나를 현실로 다시 끌어들인 셈이다. 죽은 이들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고민하고 번뇌했는지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들이 바랐던 바와 고민은 도덕적·종교적·사회적·경제적 가치와 질서에 의해 이 사회에서 탈락한 자들이나 상상하는 같잖은 것으로 처리된다. 고통 받은/받아온/받고 있는 한 개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해법으로 제시된 수많은 도덕적·종교적·사회적·경제적 담론들이 들어서면서 고통 받은/받아온/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인간은 탈탈 털린다. 인간이라는 명사에 딸린 소명/책임/책무라는 명명 하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탈탈 털려 버린 탓에 이제는 기껏해야 추상 명사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라는 단어에 그래도 양심이 켕기는지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사건의 소용돌이 가운데 이들이 어떠한 고민과 번뇌를 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잘 가시게 설령 변화가 없을지라도 이 세계는 우리의 세계이네라는 형국이다. 어쩌면 언제나 이러한 형국으로, 그러니까 이제는 싸늘하게 식어버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해법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이라는 명사에 딸린 소명/책임/책무를 묻고 따지고 동시에 허위(?)에 찬 애도를 표함으로써 우리 자신은 이들에 비해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해법이라는 근사한 마취주사제를 언론을 통해 연신 맞은 결과가 아니라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의 탄생 이래로 생겨난 문화의 한 양상일까?

 

아 잠깐. 내가 이들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아직도 어리다고? 제도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법한 나이이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책임 방기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나의 항변으로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다른 모든 이유는 사라지고 인간을 구하는 영화를 언급하면 그건 ‘영화이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성서도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그건 ‘성서이니까’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나지막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성서는 죽은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인 꿈이 아니라 상당히 합리적인 이유나 논리를 가진 이야기라고 떠들 것이다. 성서가 마치 도덕 교과서 혹은 문화의 가치를 지키는 건전한 책인 마냥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과연 그런가? 예수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친다. 하지만 왜 굳이 안식일인가? 굳이 안식일에 고쳐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안식일에 고치지 않으면 당장 죽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유대교의 율법이 가혹했기에 강행해야 했다고? 유대교의 율법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지 않다. 급박한 상황이라면 허용한다. 그럼에도 예수는 굳이 강행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로 상대방을 꾸짖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이다.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다. 바로 사람이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논리인가. 하지만 가장 강력한 논리다. 적어도 성서에서는 말이다. 또한, 예수의 밥상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밥상이다. 역전을 꿈꾸는 밥상이다. 아침부터 일을 한 자와 오후 늦게 들어와 일한 자가 동일한 임금을 받는 이상하고 희한한 세계다.

 

불행하게도, 이런 이상하고 희한한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힘 있고 돈 있고 능력 있고 집안 좋고 폭넓은 인맥을 가진 이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침부터 일하지 않아도 이들은 동일한 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번다. 이들은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단 한 번의 실수에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인간들과 달리 여러 번 실수해도 살아남는다. 이들의 고민과 번뇌는 같잖은 이들의 같잖은 비현실적인 고민과 번뇌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유익하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인 고민과 번뇌이다. 그렇기에 관대하게 용서받는다. 설사 처벌된다 하더라도 이들의 삶의 터전은 굳건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처벌받기 전보다 더 상승한다. 또한, 굳이 누가 나서서 해법을 제시할 필요도 없다. 도덕적·종교적·사회적·경제적 해법들은 언제나 이들을 비켜간다. 인간이라는 소명/책임/책무를 들이대며 이들을 따지기보다는 푼돈에 지나지 않는 내 돈을 내서라도 관대하게 살려두고자 한다. 이들이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소위 낙수효과다. 뒤집으면, 같잖은 자들은 죽는다 해도 나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에 찬 논리다.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서라면 이들은 영웅인 셈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라. 신약성서와 달리, 우리의 세계는 노동과 금욕이 지배적인 가치로 자리를 잡은 자본주의 세계라는 것을 나는 안다. 개신교도들에게 잘 알려진 프르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세계라는 것쯤은 잘 안다. 허영과 탐욕에 찬 귀족과 배고픔에 가득 찬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이 양쪽을 물리치고 노동과 금욕을 내세운 부르조아의 세계라는 것쯤은 안다. 노동에서 밀려난 자들은 대접받을 가치가 없는 자로 치부되는 세계이고 이들이 저지른 범죄나 일탈은 노동과 금욕으로 교화되는 세계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노동과 금욕을 내세우며 현실의 노동자를 가혹하게 부리거나 탄압하던 18~19세기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오지 않았나? 부르조아적 질서는 노동에서 밀려나 무위도식하는 자마저도 끌어안아 보려 하지 않았나? 한마디로, 이제는 복지 국가라는 개념이 자리한 세계이지 않는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밥상의 세계로 감히 진입해보려는 세계이지 않았나? 아 내가 착각했나보다. 아직까지는 밀려난 자들에게까지 은혜라는 선물이 작동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버거운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밀려난 이들이 참혹한 현재로 인해 예수의 밥상에 초대받기보다는 리셋 버튼을 더 누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내가 까맣게 잊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