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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이 빌어먹을(수도 없는) 세상에서

“이제 물이 찼다.”사회적 저체온증을 앓고 있는 시대를 비추는 말 / 김진아

 

김진아 목사 (기장총회 교육국 교재개발부장, NCCK 교육위원)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관심과 실천은 고사하고, 말이라도 그렇게 하던 시대마저 지나갔다. 한국 주류미디어의 시선은 ‘함께’가 아니라 혼자에 맞추어져 있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측면에서 혼자 해내는 것은 미덕이자 능력, 더 나아가서 가치와 흠모의 대상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담긴 강력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일은 알아서 하는 것이다. 누구도 알려주거나 관여하지 않는다.’

 

이 말은 프라이버시의 존중이나 개인 권리 보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아주 적극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각자도생’의 불문율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성글기 짝이 없는 가운데 맞이하게 되는 ‘함께’가 아닌 ‘혼자’는 고립과 불안정성과 위기를 초래한다. 전체 가구의 삼분의 일을 훌쩍 넘으며 (2020년 세대원 수별 가구 비율에서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39.2%이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혼자’의 삶은 프리랜서, 유연한 노동조건, N잡러 등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되지만, 사실 취약하기 그지없는 삶의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뜻을 포함한다.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개인과 가족의 삶은 위태롭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웃과 공동체를 돌볼 겨를 없이 오로지 내 가족의 생존을 위해 쉼없이 달려도 그 삶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완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조양의 가족은 쉽지 않았던 달리기의 멈춤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이후 세상에 알려진 것은 가족의 더 나은 삶과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흔적들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접으면서 쌓인 독촉장과 카드빚, 은행대출, 가상화폐투자와 손실, 불면증, 공황장애와 우울증 등 지나온 흔적들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가족이 선택한 것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가족은 사라짐에 필요한 절차들을 밟기 시작했다. 아이의 학교에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수면제를 구입하고, 만조가 언제인지 물때를 검색하고, 6일 동안 머무른 숙박료를 지불하고, 숙소를 떠나기 30분 전부터 분리수거를 했으며, 모두 잠든 깊은 밤에 아이를 둘러업고 숙소에서 나왔다는 보도기사들을 통해 알게 된 그 가족의 사라짐을 위한 절차들은 눈물겹도록 차근차근하다. 그렇게 모든 절차를 지나 마침내 송곡항 방파제에서의 1시간, 그리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제 물이 찼다”였다.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이는 자식의 생명권을 빼앗은 극단적인 아동학대이기에 범죄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보기 때문에 벌어지는 폭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모가 죽은 후 자녀의 삶은 보나 마나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그릇된 판단이 이와 같은 비극적 폭력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이다. 일견 수긍할 만한 주장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어리석고 폭력적인 부모에게 희생당한 아이의 사건으로 요약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좀 더 솔직하게, 이 사건을 초래한 것이 부모의 무지와 폭력성인가?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 아이만 폭력에 희생당한 피해자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진실을 담은 언어가 좁고 일방적일 때 사회는 불행해진다.

 

계속 묵직하게 넘어가지지 않고 남아있는 단어는 ‘체험학습’이었다.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 가족이 밟은 첫 번째 절차가 체험학습 신청이라는 것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체험학습은 아이들이 실제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장치이다. 실제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10살 아이의 마지막 체험학습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언제든 더 능력 있는 대체재로 치환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부모의 삶을 아이들은 매일 지켜본다. 효율과 생산성의 수치들을 들먹이며 교육부가 경제부처인 것을 잊지 말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최고 권력자의 목소리에서 아이는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강력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학습한다. 짧고 강렬하게 기획된 온기 없는 아름다움에 열광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개인이 가진 소비의 능력이 최고의 가치이자 중요한 것임을 배우고 학습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겉모양의 그럴싸함을 보고 다가가 손을 대었을 때 느껴지는 섬찟하리만치 차가운 냉기이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체험을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이 실제 삶이 가진 차갑고 냉랭한 온도라면, 완도 앞바다에서 마지막 순간에 흘러나온 “이제 물이 찼다.”는 말은 차가운 물 속에서 견디기를 포기하고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게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추는 말이지 않을까?

 

냉기가 감도는 곳에 생명이 살아날 리 없다. 어쩌면 우리가 앓고 있는 것은 사회적 저체온증일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모두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할 교육과 종교는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기능을 위해 유지되는 오래된 도구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색다른 목소리는 상업적 효용가치를 가질 때 활용되다가 곧 맥없이 묻히고 만다.

 

혹자는 체온 몇도 낮은 것이 뭐 그리 큰일이냐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몇 도의 온도로 사람이 죽음의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생명을 회복하기도 한다. 온기를 잃은 사회에서 연대의 끈을 붙잡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서히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지를 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온기도 생기도 잃어가는 사회와 질서가 더 강화되며 이어져갈 때 결국 모두의 삶이 불가능해진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조직의 형태나 말의 그럴싸함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노력이 필요하겠다. 명료하게 말해서 다시 온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각자 알아서’ 사는 거라고, ‘그 또한 그들의 선택이며 권리’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삶의 주제가 교육이고 종교인 사람들의 고민은 그런 답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보적인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과제가 있다고 말하던 프레이리(Paulo Freire)의 말을 다시 길어 올린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교육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희망을 말하고 불씨를 틔우는 일이 조롱받고 공격당하는 시대이지만,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한 존재를 신앙의 내용으로 하는 교회라면 더더욱, 차가움 속에 질식하고 있는 생명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는 것이 맞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말하며 생명을 살려내는 온기를 위해 분투하는 일, 그게 이 시대의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