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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신학 2기/이 빌어먹을(수도 없는) 세상에서

이 빌어먹을(수도 없는) 세상에서 / 정성훈

 

정성훈 (상천감리교회)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이 또 들린다. 홀로서기를 시도하던 청년들의 극단적 선택, 생활고와 질병으로 고통받던 수원 세 모녀의 극단적 선택. 줄곧 들려오곤 했던 단어지만, 지난 여름, 유나양 가족의 ‘극단적 선택’ 이후, 이 단어가 무척이나 자주 들려온다.

 

혹자는 10살의 어린 소녀는 선택한 적이 없다지만, 그렇다면 부모는 과연 그것을 선택‘한’ 것일까? 스스로 자신의 생과 자녀의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에 놓였던, 아니 내몰렸던 이들에겐,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져야 할 누군가와 무엇이 있었다.

 

그러나 왜 열심히 노력하며 일하지 않았냐고! 그러면서 굳이 좋은 차를 탈 필요가 무엇이었냐고! 아이는 무슨 죄며, 아이만 불쌍하다는 우리의 말들은 결국 이 극단적 선택의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지운다. 이 질문에 더 이상 답할 수 없는 그들이기 때문에 비난과 질문은 끝이 없이 날카롭다.

 

그러나,

 

사실, 당신도 아우디도 타고 싶지 않은가! 당신도 제주도가 좋지 않은가! 아우디 정도는 타야 하고, 한 달의 체험학습 정도는 가야 ‘잘 사는’ 이 세상이 아닌가! 다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고작(?) 그런 상상과 이상 속에서 살아가지 않던가! 그것말고 무엇을 더 상상하고 그려낼 수 있는 세상이란 말인가!

 

어쩌면, 더 이상 답할 수 없는 그들은, 이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대로, 정말 잘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힘겨웠다. 도무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어딘가에 빌어 먹을 수도 없었다. 열심히 땀흘리며 서서히 볼 수 있는 빛 대신, 고스란히 쌓여가는 빚만 보였다.

 

그렇다. 사실, 이 빌어먹을 세상, 아니 도무지 빌어먹을 수도 없는 세상이 맞다. 우린 그 세상에 산다. 밉지만, 미워할 용기가 없고, 물론 뒤집을 힘은 결코 없는 것 같다.

 

‘서서히 침몰해 가는 배를 다시 뒤집을 수는 없을까?’ 무기력했던 우리는, 이미 깊이 빠져버린 차량 앞에서 무기력과 무심까지 느꼈다. 인양되는 배 앞에서 절망스러웠고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그렇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무감각해진 것 같기도 하다.

 

기대했던 ‘사회적 영성’은 ‘자본의 욕망’에 정녕 맞설 수 없는가![각주:1] 우리는 그저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심한가! 교회는, 기독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무슨 말이든 할 의지는 있는가! “이 빌어먹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할 말이 많아야 겠다.

 

  1. 참조. 김진호 외 13명, 『사회적 영성-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현암사, 2014) [본문으로]